[토요일에 만난 사람]"佛畵에 빠져 100억 쾌척까지.. 인연이란 게 참 묘하지"(동아일보)_1
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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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영월군 김삿갓면 망경대산길 135-3. 해발 1100m 망경대산 서쪽 800m 고지에는 만봉사·만봉불화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150억 원을 투자해 대지 7687m², 지하 1층 지상 2층 박물관에 고 만봉(萬奉) 스님이 그린 탱화 25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어찌 된 영문일까. 조선 태종 때 한성부윤을 지낸 뒤 영월로 낙향한 충신 추익환이 어린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영월로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고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며(望京) 눈물 흘렸다고 해서 망경대산이라 불리는 이곳에 불화박물관이라니.

인연(因緣)이라는 게 참 묘하다. 불교의 핵심 중 하나가 연기설(緣起說)이다. 만물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겹겹의 인연의 그물망으로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 불화박물관의 탄생도 인연이 겹겹이 쌓여 이뤄졌다.

약 100억 원을 쾌척해 박물관 설립의 주역을 담당한 이용국 (재)신원불교재단 이사장(79·㈜신원휄트 회장)은 부처님이 곧 어머니였다. 8세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어렸을 때 너무 외롭게 자랐다. 아버지가 계셨고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어머니의 부재는 그의 마음을 늘 쓸쓸하게 했다. 시간만 나면 산소를 찾아 엎드려 울다 내려오길 반복했다. 그럴 때 그의 마음을 달래준 곳이 사찰이었다. 충남 홍성 출신인 그는 사월초파일만 되면 집에서 가까운 용봉사를 찾았다. 멀지만 수덕사까지 가기도 했다. 절에 다녀오면 마음이 포근했다.

“불혹이라는 40세가 넘어서도 늘 어머니 품이 그리웠다. 그럴 땐 절을 찾았다. 당시 시골엔 불교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하고 어울려 절에 많이 놀러갔다. 부처님 얼굴을 보면 그렇게 마음이 따듯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처님에게 의지하게 됐다.”

13세 땐 전북 군산의 동국사로 들어갔다. 출가가 아니라 일본인이 세운 동국사의 주지가 5개 국어를 한다고 해 공부하러 들어갔다. 일제 치하였고 못살던 시절이라 뭔가 희망을 찾기 위해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부처님 앞에서 결혼하는 게 유행이라 늘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시끄러워서 공부가 잘되지 않았다. 사춘기이기도 했다.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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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봉 스님은 이 이사장이 사업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1981년에야 만났다. 각종 사회봉사활동을 하던 최복숙 만봉불화박물관 관장(72)과의 인연이 만봉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당시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주지였던 만봉은 명부전(冥府殿)을 완성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봉원사에 훌륭한 스님이 계시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최 관장이 봉원사를 찾았고 만봉의 부탁에 탱화에 빠진 경우다. 최 관장의 회고다.

“봉원사에 들어가는데 감나무 밑에 앉아 있던 만봉 스님이 반갑게 맞이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 차 한잔 하는데 스님이 ‘며칠 전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턱이 동그란 보살이 올 것이며 그분이 명부전 짓는 데 힘을 써 줄 것이다’고 했다고 말하셨다. 그러면서 다짜고짜 ‘제 그림을 팔아 돈 좀 만들어 주세요’라고 하셨다. 당황스러워 처음엔 못 하겠다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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